고통을 극복하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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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굳은살의 희망 >

 

다이언 레인이 주연한 영화 ‘투스카니의 태양’에서 프랜시스는 어느날 갑자기 남편으로부터 이혼당하고 집까지 빼앗깁니다. 허름한 독신자 전용 아파트로 급하게 들어간 프랜시스는 부동산 업자로부터 밤에 옆 방에서 우는 소리가 들려 시끄러우면 벽을 쳐서 멈추게 하라는 말을 듣지요. 그 아파트는 재산을 날리거나 배우자와 헤어진 뒤 임시로 옮겨온 사람들이 많아서 우는 사람이 종종 있다는 거지요. 어느 날 밤, 피곤한 하루를 보낸 프랜시스는 옆 집에서 한 남자의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견디다 못해 벽 쪽으로 다가갑니다. 그리곤 쿵쿵, 힘껏 벽을 두드립니다.

 

영화 ‘밀양’에서 신애는 아이가 유괴된 뒤에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유괴범의 협박 전화를 받은 뒤 무섭고 아픈 마음에 도움을 청할 누군가를 찾아 밤거리로 나섭니다. 이제 막 밀양에 이사를 온 터라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 신애는 자신에게 호의를 가지고 계속 접근해온 종찬에게로 걸음을 옮기지요. 그런데 종찬이 운영하는 카센터까지 갔던 신애는 그냥 발길을 돌리고 맙니다. 그 밤에 종찬은 마이크를 잡고 카센터 안에서 혼자 신나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던 거지요.

 

한 사람이 외로움에 울먹일 때, 다른 한 사람은 벽을 두드립니다. 한 사람이 극심한 혼돈 속에서 떨 때, 또 한 사람은 노래를 부르면서 한껏 기분을 냅니다. ‘투스카니의 태양’과 ‘밀양’의 장면들은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프랜시스는 그 자신도 힘겨운 나날을 보내는 처지이지만, 다른 누군가가 아픔에 못 이겨 울음을 터뜨릴 때는 울컥 짜증이 치밉니다. 종찬은 신애를 사랑해서 계속 따라다니지만,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가 신애의 고통을 진정으로 이해한 것 같진 않습니다. 따지고 보면 사실, 절절한 마음과 달리, 종찬이 신애에게 실제로 도움을 준 것도 별로 없지요.

 

‘밀양’이란 영화가 그토록 보아내기 힘든 이유는 신애라는 인물이 그 모든 고통을 철저히 혼자서 치러내기 때문입니다. 남편으로부터 배신당하고, 그런 남편과 사별하고, 아들까지 잃은 데 이어, 종교로 귀의해보려는 노력까지 수포로 돌아갈 때, 신애는 오로지 혼자입니다. 고통이란 감각 속엔 외로움이란 감정이 반드시 들어 있기 마련이지요. 고통이란 결국 홀로 겪어내야만 하는 것이기에 더욱 끔찍합니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연출한 ‘A.I.’에서 하비 박사는 새로 개발한 로봇이 고통의 감각을 기억하고 그에 반응하기까지 하는 특성을 갖췄다는 설명을 함으로써, 그 로봇이 인간에 가장 가까운 최첨단 로봇임을 확언합니다. 인간다움의 핵심을 고통으로 보는 견해인 거지요. 남(어머니)의 고통으로 시작해서 나의 고통으로 끝나는 인간의 삶에서, 어쩌면 고통이란 생(生)의 특정한 순간에 난입하는 돌출점이 아니라, 생의 기본 조건 같은 건지도 모릅니다. 꿈인지 생시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볼을 꼬집어 보곤 하는 것은 고통이 살아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고통스러울 때, 사실 위로라는 것은 부질 없는 짓이지요. 타인의 고통이란 온전히 이해하기조차 불가능한데, 어떻게 위로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나마 효험이 있는 위로는 상대의 격심한 고통 앞에서 내가 겪었던 고통을 술회할 때 가능해집니다. 위로란 다가가 대화하고 소통하는 데서 이뤄지는 게 아니라, 떨어져 독백하고 탄식할 때에야 비로소 발생할 수 있는 것이지요. 하나의 고통은 다른 고통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서 함께 평행선을 달리는 광경을 보고서야 비로소 약간의 위안을 얻는 셈이지요.

 

결국 인간을 고통에서 일어설 수 있게 하는 것은 타인의 위로가 아닙니다. 스스로의 유기체로서의 생명력 그 자체입니다. 살아 있는 한, 인간의 생명력은 고통에조차 기어이 적응하고 마니까요. 신발은 반복적으로 마찰하면 닳아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인간의 맨발은 계속 돌아다니다 보면 굳은살이 생겨서 더 이상 통증을 느끼지 않게 되지요. 물리학적인 법칙조차 벗어나는 인간의 생명력과 적응력이야말로 역설적으로 희망의 근거가 되는 셈입니다.

 

한 사람의 처절한 비극을 다룬 ‘밀양’에서 결국 희망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어쨌든 삶에는 굳은살이 있으니까요. 신애는 그 모든 고통을 겪어내고서도 끝끝내 살아 남았으니까요.

 

ㅡ이동진(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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