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들의 행진
Movie

<바보들의 행진>(1975, 하길종 감독)

 

 영화는 1970년대의 풋풋한 대학생활을 엿보는 느낌이라 친근한 마음으로 볼 수 있다. 미팅, 체육대회, 데이트 등등 대학생들이 누리는 문화는 40년 전에도 별반 다르지 않게 즐겁고 유쾌해서 신선한 충격으로 와닿는다. 영자와 병태가 나누는 직설적인 대화들과 병태와 영철이 경찰 도주 장면에는 코미디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재미와 몰입감을 준다. 나는 마치 70년대의 대학가로 시간여행을 하는 것처럼 영화에 빠져들었다.

 

 영자는 능청스러운 거짓말을 하고 사기를 치지만 밉지 않고 톡톡 튀는 매력이 있다. 교수님을 찾아가서 학점을 달라고 우는 연기를 하고 병태를 호령하는 당돌한 여성이다. 병태에게 "철학과 나와서 날 어떻게 벌어 먹이니?"라고 나무라기도 하고, "여자는 젊을 때 팔아야 된다"라며 병태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한다. 그런 영자는 알 수 없는 슬픔을 가지고 있다. 연극 조연을 마치고 대기실 거울에 비치는 영자의 얼굴에는 밝음 이면에 있는 어두움이 보인다. 어두움을 감추고 있기에 영자의 밝음 역시 연극적일 수 있. 

 

 영자가 현실적이고 직설적인 인물이라면, 병태는 영자랑 만날 때마다 꿈에 대해 이야기한다. '병태의 꿈', '죽은 자의 꿈' 등 병태는 먼 곳을 바라보며 막연한 꿈을 꾼다. 병태의 친구 영철은 여자하고 있으면 말을 더듬고 이어가지 못하는 쑥맥이다. 연애는 번번이 실패하고 술만 마실 줄 아는,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는' 현실을 살고 있다. 영철은 이 다음에 돈을 많이 벌어 성공할 거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닌다. 하지만 당구장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사람과의 믿음이라고 역설한다. 그리고 배달부 아이로 인해 영철은 자신의 믿음을 지켜낸다.

 

 청춘을 소재로 한 멜로드라마처럼, 영화의 초반부 분위기는 상당히 밝다. 영자의 표정은 해맑고 영자와 병태의 사랑 이야기는 풋풋하다. 그러나 목표를 달성하고 서사가 완결되는 고전적인 내러티브와 달리, 영화에서 주인공들의 목표는 좌절되고 결말은 어둡고 쓸쓸하다. 병태와 영철은 고뇌하지만 무엇에 대해 고뇌하는 것인지는 모호하. 대학생 유흥 문화는 그들을 잠시 도피하게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청춘은 앞으로 나아가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유신이라는 시대는 청춘이 가진 힘을 퇴색시킨다. 영화 속 달리기’라는 모티브는 어디론가 나아간다는 느낌보다는 도망간다는 느낌을 준다. 영화 초반에 병태와 영철은 장발 단속 경찰로부터 도망간다. 젊음의 에너지를 지닌 그들은 도로 한 가운데서 질주하고, 달리기로 도시에서 벗어나 바다 너머 지평을 바라본다. 하지만 그들의 에너지에는 방향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들이 에너지를 발산하는 곳이 군사 퍼레이드가 열린 여의도 광장이라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무작정 달려간 바닷가에서조차 그들은 길을 찾을 수 없어 서성인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에 둘러싸인 바닷가처럼 그들의 앞길은 불확실하고 모호하다

 

 영화는 마치 영자라는 캐릭터처럼 밝은 것 같지만 어둡고, 자유로운 것 같지만 갇혀 있다. 동물원에서 사슴을 바라보는 병태와 영자의 얼굴은 철망으로 가려져 있다. 영자는 "우리 속에 있는 사슴들이 얼마나 답답하겠니"라고 하지만, 정작 우리는 사슴이 아닌 병태와 영자의 샷과 결부된다. 데이트 중에 멀리 있는 기차를 바라보는 병태의 모습은 마치 자유롭게 느껴야 될 곳에서조차 자유를 갈망하는 듯이 보인다. 영철은 술에 취해 밤거리를 배회하다가 경찰을 만나 구치소에 갇힌다. 밤새 술 마시는 자유를 누리지만, 밤중에 거리를 걷을 수 없는 통금이라는 현실은 이중적이다.

 

 자유로워 보이는 대학생들은 텅 빈 강의실과 서슬 퍼런 권위 속에 있다. 술 마시기 대회에서조차 교수들의 심사를 받는 장면은 학생이 누리는 문화에서 학생이 주체가 되지 못함을 보여준다. 교육이라는 명목 아래 학생의 뺨을 때리는 교수, 학생들을 잡으러 가다가 상급자를 보고 멈춰서 경례하는 경찰들, 배달부 아이가 횡단보도를 아무데나 건넜다고 한 시간 동안 붙잡아놓은 경찰. 목표와 수단이 전도되고 경직된 인간 군상들은 대학생들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없는 대상으로 희화화되기도 하지만, 그들에 의해 짓밟히면서 일종의 괴리를 만들어낸다.

 

 영화는 자유로운 꿈을 꾸는 대학생들의 모습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시대상을 빗대어 보여준다. 그것은 어쩌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과거 정권에서 벗어나 개인의 자유를 한껏 보장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어딘가에 갇혀 있지는 않나. 또 다른 권위주의가 우리 주변 곳곳에 깃들어있지는 않나. 우리가 사는 시대는 얼마나 자유로운 시대일까. 40여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지금 청춘이 여전히 고뇌하고 방황하는 "바보들의 행진"에 마음이 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고전영화 바로보기 링크: youtu.be/4PvzT5WnN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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