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로의 시간여행, 박하사탕
Movie

<박하사탕>(2000) (스포일러 주의)

 

 영화는 개인이 순수를 잃어가는 과정을 시간의 역순으로 담아낸다. 주인공 영호의 가장 타락한 모습이 처음에 제시되고 그의 시간은 순수했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20년 후에 오게 될 장소에서 여긴 내가 너무나 잘 아는 데거든요라고 말하는 스무 살 영호는 마치 자신의 비극적 결말을 알고 미래에서 온 사람처럼 느껴진다. 영화는 이미 타락해버린 영호가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과거로의 시간여행은 영호의 순수에 대한 갈망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때로 돌아갈 수 없는 아픔을 체험하게 해준다. 영화에서 영호의 일생은 대부분 불행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래서 영호의 갈망은 더욱 처절하면서 간절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영호의 행보는 순수했던 자신을 부정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1979년, 사진기 모양으로 들꽃과 첫사랑 순임의 얼굴을 담았던 영호의 손은, 1년 뒤 순임을 닮은 여고생을 격발하는 손이 된다. 이후 그 손은 학생들을 고문하다 오물을 뒤집어쓰는 더러운 손이 된다. 그는 그 손으로 보란 듯 순임 앞에서 홍자의 엉덩이를 만진다. 영호는 기차 앞에서 순임이 선물한 카메라를 돌려준다. 카메라는 이름 없는 들꽃이라는, 세상에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담고자 하는 영호의 바람이다. 순수함을 상실한 영호에게 카메라는 더 이상 의미를 담지 못한다. 

 

 경찰이 된 영호는 아내 옆에 있을 때조차 계속 신문을 쳐다본다. 이름 없는 들꽃이라는 명명할 수 없는 존재를 담고자 했던 영호는, 세상이 명명하는 활자들을 담기 바쁜 어른이 되었다. 영호는 순임의 남편을 통해 투병 중인 순임을 만난다. 그는 순임이 오랜 세월 간직해온 카메라를 건네받지만 단돈 4만원에 바로 팔아버리고 남아 있는 필름을 보며 오열한다. 가지고 싶은 순수함과 가질 수 없는 현실의 괴리는 영호를 괴롭게 한다.

 

"나 다시 돌아갈래!!"

 

 개인이 순수를 잃어가는 과정은 시대의 아픔과 긴밀하게 얽혀있다. 개인이 시대에 충실할수록 개인의 순수는 멀어져갔다. 80년대 시민과 학생들은 순수를 지키기 위해 투쟁했지만 군인과 경찰들에 의해 순수를 잃어갔다. 시대에 맞선 이들은 피해자가 되었고 순응한 이들은 가해자가 되었다. 영호는 선량한 여학생을 사살한 가해자이자 시대에 휘말려 원치 않는 삶을 살게 된 피해자다. 1987, 그는 개처럼 잔인하게 학생들을 고문하는 형사가 되어 있다. 1997IMF 외환위기는 사업가로 성공한 영호의 삶을 나락으로 빠트리고 몰락의 길을 걷게 한다.

 

 영호는 결국 구원할 수 없을 만큼 타락하지만, 과거에는 누구보다 순수한 청년이기도 했다. 5.18 민주화 운동은 영호에게 치유할 수 없는 절룩거림을 남겼지만, 영호는 경찰이 아닌 다른 직업을 택하고 자신의 상흔을 극복해갈 수도 있었다. 경찰이 된 것과 사채를 쓰고 여직원과 바람난 것은 모두 영호 개인의 선택이다. 영호가 현실과의 갈등 속에서 순수함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기차 앞에서 마지막으로 떠나가는 순임을 놓치지 않았더라면, 순수했던 과거 자신을 그토록 부정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영호는 훗날에 있을 더 큰 타락과 파멸을 겪지 않을 수도 있었을까.

 

 영호는 사회가 요구하는 의무를 성실하게 이행하고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냈다. 군인과 경찰 시절 국가에 충성을 다했고, 가구점 사장으로 성공하기까지의 삶 또한 치열했을 것이다. 그러나 삶을 대하는 태도와는 다르게 순수라는 세계는 멀어져 갔다. 사회의 폭력성에 순응하여 스스로 폭력의 주체가 되어버린 영호의 모습에서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을 떠올렸다. 그의 삶은 외적인 힘에 맹목적으로 순응한 삶이자 옳고 그름이라는 가치 판단에 무뎌진 삶이었다. 우리는 악한 행동을 한 사람이 자신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믿지만, 영호와 아이히만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시대에 순응하며 살아온 영호의 시민성은 어쩌면 소시민인 우리의 모습을 비추는지도 모른다.

 

"영호씨 꿈이요. 좋은 꿈이었으면 좋겠어요."

 

 영화의 마지막에는 가장 순수했던 시절의 영호와 순임이 있다. 영화는 내내 때 묻고 타락한 영호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마지막에는 그의 삶에서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지점에서 멈춰 선다. 그곳은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외쳤던 영호의 마지막 바람이 실현된 공간이기도 하다. 영화는 순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순수하지 않은 모습들로 가득 차 있다. 이미 순수함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순수했던 순간은 더욱 아름답고 간절하게 느껴진다.

 

 영호의 삶은 철저히 소외된 삶이다. 아무도 영호가 가진 역사적 아픔에 관심이 없다. 이혼한 부인을 찾아간 영호는 문전박대를 당한다. 생에 마지막으로 찾아간 야유회 동창들은 철로 위에 올라간 영호를 신경쓰지 않고 자기네들끼리 웃고 떠든다. 마지막까지 영호의 존재를 기억해주던 순임마저 떠나면서, 영호는 끝끝내 자신의 아픔을 타인과 공유하지 못한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멈춰선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이토록 소외된 삶을 살았던 영호에게 영화로서 건넬 수 있는 작은 안식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순수를 향해 나아가는 영화의 시간여행은 자신의 삶을 이해받고자 하는 영호의 작은 바람을 실현시켜주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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