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름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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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쉬와 모랭의 '시네마 베리테' 실험은 무엇을 남겼나:

<어느 여름의 기록(Chronique d'un été)>, 1961

 

 어쩌면 내가 영화를 좋아하게 된 이유에는 영화가 재미있어서, 영화란 힘들고 고단한 현실로부터 나를 잠시나마 벗어나게 해주니까, 영화라는 예술이 오락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파리 시민들의 고단한 삶의 이면을 그대로 직시하게 해주는 다큐멘터리 영화 <어느 여름의 기록>를 처음 보았을 때, 그것은 나에게 다소 영화답지 않은 영화로서 느껴졌다. 영화는 초반에 거리의 파리 시민들을 대상으로 당신은 행복한가요?”라는 근원적이고 순수한 질문을 던지는 것에서 시작한다. 행복에 관한 질문은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어떤 근원적인 장소로 움직이는 힘이 있다고 느낀다. 영화를 보는 나 역시 지금 스스로에게 행복하냐고 질문하며, 내심 영화가 행복에 대한 하나의 해답을 찾고서 그것을 제시해주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졌다. 그런데 영화의 중반으로 가면서 인터뷰이들은 점점 깊어지는 감정의 골을 드러내고 그것은 극단적이거나 공허한 감정으로 치달았고 그들을 지켜보는 나의 감정도 그들과 동화되어 불편하고 우울해지는 것을 감내해야만 했다. 행복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했던 질문자의 화두는 이제 영화의 후반부에 와서는 더 이상 그들이 행복한가에 있지 않다. 질문자는 그들에게 어떻게 살아가고 있어요?”라고 질문하고 그들은 현재 자신들이 얼마나 불행한가에 대해 토로한다. 파리 시민들의 행복관에 대한 이야기인줄 알았던 영화의 내용이 사실은 그들이 얼마나 불행한가, 그들의 불행은 어디에서 오는가와 관련된 공허한 절망에 관한 이야기였다는 것은 나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영화적 진실을 구현하고자 하는 시도였던 루쉬와 모랭의 시네마 베리테(Cinema Verite)실험은 1960년 파리 시민들에 대한 불편한 진실만을 안겨준 채 엔딩을 맞이한다.

 

 파리 시민들의 인터뷰 내용을 통해 드러나는 1960년 파리 사회의 진실의 단면은 현대 사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 그들은 노동을 통해 어떤 긍정적인 성취의 가능성을 찾는다기보다는 봉급을 타려고 묵묵히 일하며 단지 견디고 적응하기 위해 매일매일 정신적인 격전을 치른다. 그것은 그들에게 희극이자 비극이라고 말한다. 공장의 안과 밖에서의 모습을 보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그들의 이중성에 대한 희극이자 자신의 일을 고를 수 없이 일에 함몰되는 그들의 무력감에 대한 비극이다. 인터뷰이들은 각자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어떤 총체적인 시대 안에서의 고민을 공유하고 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는 무력감이자 중층적인 자아로서 진실한 삶을 살지 못하는 패배감이다. 프랑스 노동자들은 변화 없이 무미건조하고 지루한 노동에 함몰되어 진짜 내가 하고 싶은 걸 하지 못하고 그 안에서 진짜 나를 지키기 위해 애를 쓸 뿐이다. 파리의 골방에 거주하는 이탈리아인 마리 루는 자신의 생각대로 살지 못하며 자기 자신을 표출하지 못함에 우울해한다. 혈기왕성해야 할 나이인 스무 살 청년은 세상에 적당히 타협하며 살고 능동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는 데서 무력감을 느낀다. 어느 프랑스 노동자의 말처럼 어쩌면 그들은 개인주의자들이며 그럼에도 개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 자신을 노동에 함몰시킨 대가로 얻은 봉급과 물질로서 그들은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한다. 그들이 바라보는 미래에 대한 이상과 기대가 사라져버린 공허한 세상은 위와 같은 고민들에서 기인하는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도 어쩌면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소확행’, 소소하지만 확실하게 보장받는 행복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그것이 유행처럼 번지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미래에 있을지 모르는 크고 불확실한 행복에 대해 기대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것은 꿈꾸기 힘든 세상에서 사람들이 차라리 취할 수 있는 지독한 냉소가 아닐까. 그리고 당장 확실하게 누릴 수 있는 자본의 소비에 의해 행복이 대체되고 그 의미가 변질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삶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노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만약 지금 우리가 노동 현장에 대해 시네마 베리테를 구현하고자 하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는다면 거기에서 관객들이 느낄 지루함은 1960년 파리 사회에서의 그것과 비교해서 얼마나 다를까. 여전히 현대인들에게 노동이란 희극이자 비극으로서 본래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 그저 견디는 일일지도 모르며 워라밸(Work-life balance)’이라는 신조어가 생긴 것은 그런 이유에서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과 삶의 균형을 찾겠다는 현대인들의 몸부림은 어쩌면 일이 삶을 짓누르는 무거운 현실에 대한 반증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사실상 영화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지루함과 우울함, 공허한 절망감뿐인데도 루쉬와 모랭은 그토록 끈기 있게 그들의 영화를 통해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한다. 그것은 그들이 구현하고자 했던 시네마 베리테와도 관련 있어 보인다. '진실로서의 영화.' 과연 영화에서 진실을 구현하는 것이 가능한가? 촬영이란 인식의 주체인 감독이 인식의 대상을 선별하고 그것을 카메라의 작은 프레임 안에 담아내는 행위이며, ‘쿨레쇼프 효과’에서 시사하는 바이듯 편집의 과정에서 스토리텔링에 의한 재구성은 더욱이 감독의 의도와 색채라는 프레임을 강화할 뿐이다. 애초에 감독이 만드는 영화 안에서 객관적인 진실을 구현하기란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에 관하여 <어느 여름의 기록>에서 장 루쉬는 관찰자로서 객관적인 진실을 기록하려는 시도가 아닌 촉매제로서 감독과 카메라맨의 권한을 인정하는 과감한 실험을 한다. 그들은 카메라를 들고 사람들에게 다가가 인터뷰를 통해 참여를 유도하고 적극적으로 교감하며 상호작용한다. 영화에서 객관적인 진실이 불가능하다고 한다면,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카메라맨의 존재는 어쩌면 한층 더 가까운 진실의 이면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의 후반부에서 상영회를 마친 인터뷰이들의 대화는 시네마 베리테실험이 과연 그들의 진실을 포착한 것인지에 대한 여부를 모호하게 만든다. 카메라가 건져낸 진실의 단면조차도 상영회에서 사람들의 시각에 의해 다르게 해석되고 받아들여진다. 마리 루가 카메라 앞에서 눈물로 내비친 내면에 대해 어떤 이는 감정 과잉이었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자신을 너무 노출시킨 것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자기 자신조차 자신의 진실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다. 진실인지 연기인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중층적인 페르소나를 가진, 가면을 쓰고 사는 현대인들의 모습만이 남겨진 진실인지도 모른다. 이는 과연 진실로서의 나는 누구이며 순수한 자신으로서 본래 모습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게끔 만든다. "더욱 절망스러운 사실은, 그 어떤 경우든 모호해지는 진리의 자리를 냉담과 혐오가 대신한다는 것이다." 마리 루가 그토록 우울해하고 절망의 눈물을 흘리던 이유는 그녀가 새로 이주해온 파리에 거주하면서 어딘가에 속해 있다는 기분이 아니라 혼자 동떨어진 기분을 느끼고 자기 자신을 표출하지 못함에, 즉 진정한 소통을 하지 못한다는 것에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는 다른 이들조차 그녀와 같은 시대에서 맞닿아있는 고민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인터뷰에 대해 진실로서 공감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서로에 대한 냉담과 혐오로서 불통하는 모습마저 보여준다. 어쩌면 마리 루가 가지고 있던 소통의 단절과 고립에 대한 두려움은 더욱 심화되었을지도 모른다. “사랑에 관한 영화를 만들려 했는데 인정미 없는 영화가 만들어졌다라는 감독의 마지막 대사는 이러한 절망의 연속에 대한 절망의 표현이다.

 

영화의 후반부, 인터뷰이들의 상영회는 절망의 연속을 가져온다.

 

 돌아보면 오늘날 우리의 사회 또한 진정한 소통이 부족한 사회가 아닌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사회는 자신이 가진 의견을 제대로 표출하고 발언할 수 없도록 분위기가 형성되는 일종의 혐오 사회라고 느낀다. 이를테면 단순히 성에 대한 개인의 의견 표출은 곧 누군가에게 남녀 차별적 발언이자 성 혐오적인 발언으로 변질되어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 되기에 개인의 의견 표현은 위축되고 어느 한쪽의 입장이 지나치게 강화되는 결과를 낳는다. 우리 사회의 문제는 타자의 입장이 아닌 자기 자신만의 입장에 치우쳐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닐까. SNS 미디어의 확산으로 소통이라는 단어는 시대의 트렌드로 자리매김했지만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사회 전반적으로 공유되고 확산되는 소통이라기보다는 자기가 좋아하고 보고 싶어 하는 관심 분야에 치우친 일종의 기호로서의 소통, 협의에서의 소통이 아닌가. 발전하는 미디어 테크놀로지가 구현하는 알고리즘은 타자에 대한 무관심과 배척을 부추기고 편견을 강화하는 '필터 버블(Filter Bubble)'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지는 않은가. 1960년 파리에서 실험되었던 시네마 베리테정신을 구현하여 오히려 진실을 직시해야 할 곳은 어쩌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러한 소통 부족은 나라는 개인과도 연동되어오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나는 얼마나 소통을 해왔는가. 의견을 나누거나 대화가 필요할 때 나는 분명히 내 의견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의견에 순응하거나 아니면 충분한 설득과 토론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무작정 내 고집을 부릴 때가 많았던 것 같다. 소통을 잘 하지 않았던 것의 기저에는 사람들마다 생각하는 방식이 다 다르기 때문에 각자의 것을 존중해야 한다는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이 있었다. 그러한 사고방식은 어차피 남들이 나와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소통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남의 말을 흘려듣거나 내 생각이 옳다는 식의 아집으로 굳어졌던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나는 <어느 여름의 기록>의 상영회에서 타인들을 비난하면서 자신과는 다른 의견에 대해 수용할 의지가 없는 일부 파리의 시민들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시대가 공유하고 있는 고민에 대해 나는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했고 또는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소통의 가능성을 외면한 채로 살아온 것은 아닌가. 그 결과 나는 지금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가. 파리의 인터뷰이들이 내비치는 감정의 골과 어두운 내면 심리가 내 가슴에 파고들었던 것은 이전 그들의 삶과 나의 현재 삶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방증이 아닐까.

 

 작년 여름에 나는 처음으로 학생 단편 영화를 찍었다. 각본부터 연출, 미술, 편집까지 혼자서 도맡아서 영화를 제작했다. 나름대로 첫 작품이라 스스로에게 거는 기대가 있었고 삶을 바라보는 나만의 시각과 생각을 담아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세 달 정도의 제작 과정을 거쳐 열심히 만들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가 상영회에서 상영되자 사람들에게 여러 격려와 칭찬의 말을 들었지만, 들었던 공통적인 평가는 난해하다’,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렵다와 같은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스스로에게 있어서도 조금 아쉬운 작품이 되었지만, 한편으로 그때의 시도는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경험이 되어주기도 했다. 내 첫 단편 영화에는 소통이 부족했다. 내용 전달에 있어 미숙했던 점은 제작 과정에서 회의를 거쳐 충분히 반영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가진 생각을 사람들과 제대로 충분히 공유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영화 제작진들에게 피드백을 많이 요구하지 않았고 받았던 피드백을 충분히 반영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그러한 마음가짐이 관객들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내가 생각하는 바를 그대로 전달하고 싶었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는 나만의 독창성을 발휘해서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것은 영화 내에서의 설득의 실패로 귀결되었다. 나 자신의 의도를 담아서 만들어낸 결과물을 일방적으로 사람들에게 제시한 것은 그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형태로 전달되었다. 어떻게 보면 충분한 소통을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자기 얘기만 했기 때문에 의도했던 공감을 얻어내지 못한 것이다. 내가 가진 생각을 공유하고 함께 그려나가는 과정이 있었더라면, 내 생각을 표현하더라도 무작정 강요하는 방식이 아니라 이해시키려고 노력하고 나의 선택에 대한 동의를 구하고 혹여나 더 나은 방법이 있다면 그것을 취하려고 했었다면, 더 좋은 작품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뒤늦은 생각을 해본다.

 

 

 영화의 창작에 있어서 나의 고민거리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이고 내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잘 전달할 수 있을까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여름의 기록>의 루쉬와 모랭은 자신들의 이야기가 아닌 타자들의 이야기를 이끌어내고 그들과 소통하면서 그들의 이야기 안에서 어떤 공유되는 지점을 포착하는 것을 넘어서 자신들의 이야기와 사상마저 돌아보고 점검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그들의 영화에서 이야기는 감독의 목소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타인들과의 소통, 그리고 이를 넘어선 몰아(沒我)의 자세와 공명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영화 내에서 설득력을 가지며 사람들의 마음에 와 닿는 진실에 가까운 것은 무엇인가. 나는 마음을 열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이 있었나. ‘시네-트랜스’, 카메라를 매개로 한 쌍방향의 소통에서 자아와 타자의 경계가 무화되는 행복 공동체를 이루고자 했던 그들의 파리에서의 실험은 결국 성공하지 못했고, 그들이 카메라를 통해 다가선 인터뷰이들의 모습은 그들이 그토록 포착하고자 했던 진실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메라를 촉매 삼아 사실을 적시함으로써 현존하는 진실로 다가가고자 했던 그들의 부단한 노력은 1960년 파리 사회의 현실을 그려낸 어느 여름의 기록이 되었으며 그대로 남아 오늘날 소통으로서 영화적 진실을 구현하고자 하는 정신에 대한 귀감이 되었다.

 

 루쉬와 모랭이 과감하게 구현하고자 했던 시네마 베리테정신은 영화에 대한 내 가치관을 돌아보게 해주었다. 그동안 수많은 영화들을 보면서 나는 영화와 내 삶이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져본 적이 있었나. 단순히 영화를 소비하고 영화가 주는 달콤한 낭만에 취하여 열광하기 이전에 영화를 거울삼아 현실에서의 나의 고민 그리고 나와 시대를 같이 하는 타인들의 고민에 대해 투명하게 들여다본 적이 있었나. 나는 어쩌면 영화와 내 삶 사이에 커다란 장벽을 쌓아온 것은 아닌가. 영화를 창작하는 데 있어서 내가 보고 싶은 세상을 보여주기 이전에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성찰이 부족했던 게 아닌가. 연출과 편집이라는 영화의 매체적 특성과 감독이라는 권위를 이용해서 내가 보여주려고 한 것은 정작 보아야 하는 것들을 뒤로 한 채 허구에서 그치지는 않았나. 결국 나는 세상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나. 다음에 다시 영화를 만들 기회가 생긴다면 나는 어떻게 영화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소통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부단히도 해봐야겠다. 루쉬와 모랭의 시네마 베리테실험이 1960년의 파리 사회를 넘어서 여전히 소통이 부족한 현대 사회와 나 자신에 대한 거울이 되어주었듯 어쩌면 영화에서 진실을 구현하는 방식은 그러한 고민과도 맞닿아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