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수와 만수
Movie

<칠수와 만수>, 1988

 

 극 중 칠수는 숨 쉬듯 허세 부리고 가오를 잡는다. 영어로 폼 잡고 여대생 지나와의 낭만을 꿈꾸지만, 생계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해 미국에 있는 누나와 만수에게 의존하는 인물이다. 한편 만수는 현실의 최전선에 있는 인물이다. 팔도 사투리를 구사하며 적극적인 구직 활동을 하지만 일자리를 구하기 힘든 현실에 전전한다. 포장마차에서 뉴스를 보던 그는 보다 못해 TV를 꺼버린다. 만수가 맞닿아있는 현실은 차마 바라볼 수 없을 만큼 차갑다.

 

 칠수는 지나를 따라서 들어간 백화점에서 차가운 현실과 마주한다. 상상 속에서 그는 정장을 차려입고 지나의 어머니 앞에 서는 반듯한 청년이지만, 실제로 그는 페인트 작업복을 입고 지나의 뒤를 쫓는 남루한 노동자일 뿐이다. 백화점에서 칠수를 비추는 거울은 그곳과 어울리지 않는 현실을 바라보게 해준다. 돌아온 자택에서 멋있는 포스터 주인공 포즈를 따라해보지만 거울은 또 다시 칠수의 초라한 현실을 비춘다.

 

여대생 지나와 칠수. 배종옥님 미모에 감탄~

 

 칠수와 만수는 아버지라는 조력자가 부재한 가족사를 가지고 있다. 하우스 보이였던 칠수의 아버지는 새 부인에 얹혀 술만 마시는 인물이고, 만수의 아버지는 27년간 징역을 살고 있는 장기수다. 칠수는 지나와 계급적인 거리감을 느끼고, 만수는 양심수라는 아버지의 연좌제에 발목 잡혀 원하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다.

 

 아버지라는 의존할 수 있는 대상이 사라졌다는 공백감은, 80년대 청년들이 혼자 힘으로 헤쳐 나가야 하는 기댈 곳 없는 사회를 대변한다. 가장이 무력한 사회는 국가 권력에 억압되어 남성적인 힘을 상실한 시대의 알레고리다. 아버지가 조력자가 아닌 짐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칠수는 여전히 만수라는 또 다른 조력자의 존재에 의존하는 반면, 만수는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하며 꿋꿋하게 자생한다. 그렇기에 만수는 현실을 담담하게 살아내는 것 같지만 누구보다 고통과 울분을 감내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칠수와 만수는 벗어나려 해도 가족의 모습과 닮아 있다. 술집을 다니면서 새 부인에게 기생하는 칠수의 아버지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칠수의 누나는 미국인에게 의존하고 아버지라는 현실을 벗어나 미국으로 도망간다. 이들은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칠수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한편 만수의 아버지는 수감 중에 특별 가석방마저 거부하며 '징역을 징역답게 맞이하는', 자기 뜻을 굽히지 않는 꿋꿋한 인물이다. 알고 있는 것으로 사회를 바꾸려는 노동 운동가인 여동생에게 만수는 "세상이 그렇지 않다"며, "다 쓸 데 없다"고 말한다. 그의 여동생에게 현실을 안다는 것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뜻하지만, 만수에게 그것은 더욱 적나라한 현실을 드러낼 뿐이다.

 

 평범한 노동자인 칠수와 만수는 서로 이해하고 닮아간다. 멋모르고 낭만을 꿈꾸던 칠수는 점차 자신의 처지를 깨닫는다. 적극적으로 구애에 나섰던 지나는 반듯한 집안의 남자와 약혼하고, 미국에서 오기로 한 누나의 초청장은 결국 오지 않는다. 페인트칠을 하다가 올라간 옥상에서 칠수는 만수에게 자신의 거짓말을 고백하고 초라한 현실을 인정하는 것 같아 보인다. 한편, 칠수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낀 만수는 자신이 비관하기만 했던 세상에 고함을 지르며 쌓아왔던 울분을 토해낸다. 칠수의 존재는 세상에 순응하며 살아왔던 만수에게 용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옥상 대치씬은 영화의 후반부를 이끌어간다.

 

 그런데 칠수와 만수가 한낱 치기 어린 장난으로 벌인 아우성은 옥상 아래 사람들에게 폭력과 농성으로 비춰져 일종의 낙인이 된다. 서로 다른 수직적 공간에 있는 인물들의 엇갈린 대사와 몸짓은 한 편의 코미디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그 현실은 한편으로 공허하고 비극적이다. 주어진 삭막한 현실을 살아냈던 칠수와 만수에게, 현실을 외면했던 이들은 밝고 긍정적인 복지 사회를 이야기한다. 디제시스 안에서 모든 대화와 음향이 제거되고 어두운 배경음악이 깔리며, '높은 놈, 배운 놈, 잘난 놈, 있는 놈'에 대한 아우성은 공허해지고 불통의 비극은 배가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뒤돌아 카메라를 바라보는 칠수의 눈빛은 카메라 밖에 있는 어두운 현실을 상기시킨다.

 

 우리는 칠수와 만수의 입장에서 상황을 바라보게 될 수 있지만 경찰, 구조대, 언론과 같은 사회 기관들 역시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그들의 기능을 하고 있다. 단지 아래에 있는 이들에게는 노동자들의 몸짓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고, 칠수와 만수에게는 자신들의 행위를 폭력으로 몰아가는 상황이 억울할 뿐이다. 사회 구성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기능을 하지만 그럴수록 사회 전체가 올바른 기능을 하기는커녕 더욱 잘못되고 극단적인 방향으로 흘러간다. 문제는 누구 하나가 아닌 그들을 그렇게 만드는 소통 구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중요한 것은 사회적인 기능이 아니라 선입견에 얽매이지 않고 누군가의 절실한 몸짓과 아우성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아닐까.

 

 만수의 인생은 편견에 얽매여 있다. 만수가 처한 어려운 현실은 자신이 가진 능력보다는 그림 그리는 사람, 장기수라는 아버지를 둔 자식을 보는 하찮은 사회적 시선 때문이다. 그런 만수는 칠수에게 "사람은 알고 보면 안 돼. 보고 알아야지"라고 말한다. 사람을 보는 그대로 알아야 한다고 하는 그는 편견에서 자유롭고 싶어 하는 순수한 청년으로 보인다.

 

 만수는 그러한 현실을 살아내기 위해 누구보다 타협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리저리 팔도 사투리를 써가면서 구직을 하는 모습은 사람들이 가진 편견을 이용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올바르게 산답시고 징역을 징역답게 사는 아버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기 위한 생존 방식인지도 모른다. 소송을 걸고 변호사를 구하자고 하는 여동생에게 현실을 모른다고 나무라는 차가운 소시민의 전형이다. 이렇게 사회적 편견에 둘러싸여 있던 그가 잠시 벌였던 아우성은 또 다시 폭력과 농성이라는 편견으로 그를 옭아매려 한다. 마지막 그의 모습은 마치 주어진 현실에 적극적으로 맞선 그의 아버지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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